야밤에 마시는 독주 한 잔

kchgreenst.egloos.com

포토로그



어떤 선택이든, 실패하더라도 후회없는 길을 걸어야 - <미스터 노바디>

어떤 선택이든, 실패하더라도 후회없는 길을 걸어야 - <미스터 노바디>


모든 생명체는 몇 가지 규칙을 지닌다. 대표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친다.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이런 규칙에 의해 모든 물질은 지배받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한 발 들어가면 변하지 않을 운명도 어떤 선택에 의해, 혹은 우주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빅뱅의 발발처럼, 예상하지 못한 우연에 의해 규칙이 파괴되기도 한다. 완전한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법칙이다. 

그러나 예외의 가능성이 희박한 일정한 규칙 안에서 우연적 요소가 가미된다 하더라도, <인터스텔라>의 쿠퍼(매튜 매커너히)가 얘기한 것처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혼한 부모의 엄마를 선택하든, 아빠를 선택하든 니모(자레드 레토)의 삶은 정해져 있다. 니모는 이렇게 묻는다. “사랑은 계획대로 되는 걸까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수히 많은 변수에 의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제한적이다. 천사가 인중을 눌러주지 않은 이유로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알게 되는 니모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좌우를 선택하지 않고 가운데 길로 뛰어간들, 니모의 미래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왜냐 하면 이미 니모는 그 중간 길의 운명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는 여러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그 많은 질문들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왜 태어났고, 어떤 선택을 했고, 무슨 사랑을 경험했는가, 그리고 미래는 정해져있는 노정인가, 우연도 필연의 일부인가,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은 결정되어 있는가 등등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들이다.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살아가면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순간들은 무수히 많을 수 있지만, 어떤 선택이든 큰 범주의 규칙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지금 다니는 회사가 지긋지긋하다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뛰쳐나가 다른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지긋지긋하지 않는 회사를 만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요인이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과는 다르게 거대한 자본주의체제에서 기인되는 것이라면 개인의 선택이 근본적인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보통은 다니던 회사를 포기하는 행위를 회피하게 된다. 우리는 평탄치 않은 미래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선택을 통해서 다채로운 여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선택하는 과정까지의 복잡성과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해 그 여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지점이 내가 이해한 이 영화의 메시지다. 

영상미와 편집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미덕인 것 같다. 어떤 장면이든 허투루 찍은 티가 나지 않았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디테일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미셀 공드리 감독의 영상미가 부드러움을 추구한다면 자코 반 도마엘은 디테일함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편집이 복잡하더라도 감각적으로 수용 가능했던 것 같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제8요일> 이후 20년 만의 작품이었다. 공백이 컸음에도 감독으로서 영화적 감각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미스터 노바디>를 찍기 위해 20년을 벼려 온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통해 감독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물리학과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다보니 관객의 입장에선 단박에 영화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또한 화면의 템포가 빠르고 스토리가 여러 갈래로 꼬여 있음으로써 스토리의 맥락을 짚기가 어려웠다. 순차적으로 이해를 하면서 넘어가야 재미가 더해질 텐데, 감독은 ‘나를 따르라’며 일관되게 밀고 나간 느낌이었다. 메뉴가 많은 식당에서 오히려 하나의 메뉴를 선택하기가 더 어렵다. <미스터 노바디>는 메뉴가 많은 식당과 같았다.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깊은 고민에 쌓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선택한 길을 최선을 다 해 걸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후회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택의 기준이다. 


가깝고도 먼.......그대 이름은 가족 - <레이첼, 결혼하다 Rachel Getting Married> 내가 본 영화

가깝고도 먼.......그대 이름은 가족 - <레이첼, 결혼하다 Rachel Getting Married>


자신의 실수로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불행한 과거를 쉽게 잊을 사람이 있을까? 한평생 그 기억의 상처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만한 형벌이 또 있을까 싶다. 킴(앤 헤서웨이 역)의 삶이 그렇다. 열여섯 살(로 기억되는데) 어린 나이에 약물복용 한 상태로 동생을 차에 태우고 사고를 냈고, 그 자리에서 동생은 죽는다. 거기서부터 킴의 삶은 단절이 되었고, 어른이 돼서도 그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3-4일간의 짧은 시간을 다루는 영화다. 킴의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 역)이 결혼하기 전날부터 결혼식 다음 날까지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 사이 킴은 다혈질의 성격을 드러낸다. 불안한 심리, 분노와 슬픔, 환희와 연민, 그리고 사랑의 감정. 킴의 진심은 둥글지만, 표현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감정표현이 서툴다. 사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가족이 전부다. 그러나 오랜 기억 속 트라우마는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가 없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고,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고 싶지만 사고로 동생을 잃었던 그 시간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킴은 킴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힘들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엄마, 아빠, 언니, 동생, 그리고 나. 어느 순간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 아빠는 이혼을 하고, 동생은 세상에 없고, 나는 재활원에서 약물중독 치료를 받고 있다. 언니는 곧 결혼을 하고 출가를 해야 할 상황이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언니의 결혼식. 킴은 누구보다 이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꼬여 있는 죄의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족의 용서에 있다. 어쩌면 오래 전에 용서는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킴은 계속 확인하려 하고, 그럴수록 기억은 되살아난다. 

언젠가 가족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두가 흩어져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완벽하게 준비된 이별은 드물다. 그러기에 모든 이별은 슬픔을 동반한다. 결혼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와 이별을 통한 슬픔이기도 하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이러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내재적인 이별을 지닌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서로를 보듬을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 혹은 사랑한다는 말조차 못하고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를 그냥 보내야 했던 킴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것은 또 다른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가족은 무수한 아이러니를 지닌 애증의 공동체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의 흔들림에 있다. 킴의 마음상태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가족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결혼식을 찍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조작적이지 않은 카메라 기법이었다. 특히 킴의 과도한 행동과 수다가 진행될 때는 카메라가 더 흔들렸던 것 같다. 가족이 지닌 불안과 갈등, 오해 등은 흔들리는 카메라 기법을 통해 잘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백인인 레이첼의 결혼상대는 흑인이라는 점, 그리고 그 관계망과 엮여 있는 사람들 속에는 동양인과 남미인, 폴리네시아인종 등 매우 다양한 인종들이 모였다는 점이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인종들을 결혼식에 모아놓음으로써 미국이 다문화 국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인종의 혼합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부분만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꼭 들어보고 싶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했다. 앤 헤서웨이의 열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이 짜여진 틀에서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3일 동안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쭉 이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면이나 사건에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결혼식 파티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던 것 같다. 치밀한 연출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연출은 킴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긴 역사를 지닌 폭력 -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내가 본 영화

긴 역사를 지닌 폭력 -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직설적인 제목의 영화 <폭력의 역사>는 우연한 사건으로 밝혀지는 한 남자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한 남자’는 ‘모든 남자’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인 톰(비고 모르텐슨 역)이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해치우면서 영웅이 되고, 그러면서 과거에 ‘조이’라는 이름의 킬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족에게 배신감을 안겨준다. 양치들과 조폭들을 해치우는 감각적인 그의 솜씨는 마음씨 착한 남편에게서 볼 수 없는 잔인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참 영리한 감독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톰이라는 인간이 과거에 킬러였다는 사실과 그것을 오랫동안 숨기며 살아왔던 현재의 삶의 괴리를 드러내려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영화는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학창시절부터 폭력조직에 쉽게 노출되거나 적어도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자란다.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혹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가장 폭력적인 조직인 군대를 경험한다. 폭력은 일상이 되고 사회 구성원이 돼서도 몸에 박힌 유전자는 지우지 못한다. 대학을 포함한 사회생활도 군대 문화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남자들만의 은밀한 거래를 경험하게 된다. 룸살롱에서, 사창가에서, 술집과 옥상 등등에서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고 깊은 잔상으로 남게 된다. 

물론 그 역사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빠로부터 폭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다반사다. 술 먹고 행패부리고 엄마를 구타하고 형 누나 동생을 힘으로 누른다. 커서도 그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폭력의 역사는 아주 깊고 오래된 체험이다. 남성의 문화는 이렇게 전이되고 DNA로 각인된다. 그 경로의 절정은 살인이 법적으로 용인되는 군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근거 없는 말을 수 없이 듣고 자란다. 

결혼과 출산은 폭력의 유전자를 없애는 듯하지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가려질 뿐이다. 톰이 그렇다. 물론 그는 다정다감한 가정적 남자로서의 톰과 시키는 대로 살인을 저질렀던 조우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톰도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폭력성마저 덮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 역)와 아들 잭(애쉬튼 홈즈 역)의 표정은 변하게 된다. 폭력으로부터 공포가 얼굴에서 스멀스멀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남자의 폭력성의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인간 DNA에 존재하는 폭력 유전자를 드러나지 않도록 평화로움으로 감쌀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딸아이가 아빠에게 접시와 스푼을 가져다주듯이 어딘가에 희망이 존재한다. 학습을 통해서든 소통을 통해서든 평화로움이 더 많이 교감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보여주듯, 평화는 개인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이웃과 언론과 국가를 대변하는 경찰 등 사회 전반이 함께 일궈내야 한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나이까? - <쿼바디스, QUO VADIS> 내가 본 영화

주여, 어디로 가나이까? - <쿼바디스, QUO VADIS>


흥미롭게도 종교인구 분포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전체 인구 중에 불교 인구가 가장 많다. 22%에 달한다. 그 다음은 개신교가 21%. 천주교는 7%였다. 2014년 갤럽자료다. 권력을 좌지우지 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가장 높게 내는 개신교가 전체 인구의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아마도 이 중에서 극소수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제적 인간들일 것이고 ‘개독교’라는 조어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일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비호하는 신자들도 문제적이겠지만, 합리성은 개나 줘버린 탐욕의 목회자들이 존재하는 한, ‘개독교’라는 용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문제는 돈이다. 외형의 건물이 부를 상징한다고 믿듯, 불끈 솟은 대형교회가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다고 믿는 어리석은 목회자들의 판단은 결국 헤어나지 못할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성전 헌금을 걷고 은행 대출을 받고 토목공사를 벌임으로써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 먹는 신자들과의 네트워크, 즉 ‘교피아’는 돈을 벌기 위한 공동운명체가 돼버렸다. 그렇게 교회는 망해간다. 


영화 <쿼바디스>는 몇 몇 대형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MB의 추억>을 만든 김재환 감독의 작품이다. <MB의 추억>보다 조금 더 탄탄한 내레이션을 가지고 있고 재밌는 요소도 상당했다. 현실의 인물들을 배우들이 대역함으로써, 픽션과 논픽션을 적절하게 섞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독특한 다큐멘터리가 됐다. 대형교회의 문제를 파헤치는 피디도 ‘마이클 모어’다. 김재환 감독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쿼바디스>를 만들었다.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각으로 한국 대형교회의 치부를 본다며 어떤 모습일지가 감독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흑인 카메라맨을 종처럼 다루는 마이클 모어 감독의 모습을 보면서 역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컨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실제의 ‘마이클 무어’의 이중성, 혹은 감독의 이면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MB의 추억>보다는 잘 만든 것 같고, 그래서 재밌게 봤다. 그러나 <쿼바디스>를 영화적 다큐멘터리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배우자들의 연기가 오히려 이 다큐멘터리를 더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다큐멘터리가 대역을 사용함으로써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시켰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적 목회자들이 인터뷰이가 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는 대목이긴 하지만,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처럼 실존 인물을 어떻게든 등장시키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욱이,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예수는 관객들의 생각의 지평을 제한하는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마치 절대자의 신이 인간 행위를 심판하려는 모습은, 결국 감독의 시선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신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관객은 없을 것이다. 감독의 친절함이 오히려 영화 몰입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냥 그대로의 대형교회의 민낯을 보여주고 관객이 판단하게끔 놔두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연기자들의 연기가 나쁘지 않았고, 어거지라는 느낌이 없어서 괜찮았던 연출이었다. 

내 주변 기독교인들은 모두 훌륭하고, ‘개독교’라는 비판에 가장 억울해 할 사람들이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이들은 열심히 기도한다. 나도 어설픈 기독교인이지만, 지인들만큼 독실하진 않다. 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주님을 섬길 뿐이다. 그래선 기독교 개혁에 대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기독교인 내부에서조차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을, 개혁은 못하더라도 개선이라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외부의 노력보다는 내부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스스로의 개혁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로 이외에 다른 해답은 없어 보인다. 


여러 영화들의 짬뽕! 그러나 멋있는! - <킹스맨, Kingsman: The Secret Service> 내가 본 영화

여러 영화들의 짬뽕! 그러나 멋있는! - <킹스맨, Kingsman: The Secret Service>

새로운 버전의 <007 시리즈>라고 할까? 빠른 템포와 현란한 액션. 세련된 슈트. <007시리즈>보다는 훨씬 감각적이고 경쾌하다. 그러나 위기 장면에서 긴장감은 덜 하고 반전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야기 구조는 클리셰로 뭉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를 보는 중간에 몇 가지 다른 영화들이 떠 올랐다. <007 시리즈>의 선악 구조, <올드보이>의 장돌이 씬. <칼빌>에서의 우마 서먼의 칼놀림, <헝거게임>의 생존게임 등등. 이런 점을 감안하면 뻔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액션 위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감독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액션 하나 만으로도 볼만한 영화였다. 성당에서의 액션 씬은 폭력적이긴 했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올드보이>의 장돌이 씬이 연상된 이유다. 원빈의 <아저씨>의 날렵함도 볼 수 있었다. 정령 콜린 퍼스가 대역을 쓰지 않고 찍었나 싶을 정도였다. 60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였다. 

액션영화 혹은 첩보영화의 미덕은 역시 액션과 그를 통한 통쾌함이다. 다양하진 않지만 신형 무기들도 첩보영화의 재밌는 요소다. 근래 첩보영화 중에 <킹스맨>이 이러한 요소들을 잘 엮어낸 것 같다. 성당에서의 액션 이외에, 총과 방탄, 카메라 기능이 담긴 우산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무기다. 우산 안에만 몸을 숨기면 상대할 적이 없다. 전기충전기용 반지, 신발에서 튀어나오는 칼 등은 액션 장면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스토리의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무척 아쉽다. 비밀정보기구라고만 소개된 ‘킹스맨’이 도대체 국가 단위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하는지 명확치 않고, 사무엘 L.잭슨이 연기한 발렌타인이 무료로 나눠진 휴대폰 칩이 인간의 신경망을 건드리며 폭력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었다. 악을 소탕하는데 오로지 1-2명의 킹스맨이 활략한다고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정보기구들과의 연계가 전혀 안 보이는 점은 의아하다. 

또한 이야기 전개상 주인공은 태런 에거튼임에도 콜린 퍼스의 무게감에 비해 못 미친다는 점은 아쉽다. 왜소한 체구의 문제도 있었지만 날렵함이나 세련됨, 액션의 리듬 등은 콜린 퍼스가 훨씬 나았다. 재밌는 구성을 위해서라면 콜린 퍼스가 갖지 못한 다른 우아함을 태런 에거튼이 지녔다면 더 좋았겠다 싶다. 태런 에거튼의 여성 파트너인 록시(소피 쿡슨 역)가 인공위성을 쏘아 떨어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긴 했지만, 킹스맨 선발에서 우승을 했음에도 그 역할이 매우 협소했다는 점도 아쉽다. 오히려 발렌타인의 오른 팔 가젤(소피아 부텔라 역)의 역할이 돋보였다. 

예상 외로 한국에서 6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킹스맨>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비슷한 기간 상대할 영화가 많지 않았다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겠지만,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는 입소문이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킹스맨>은 액션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이 충분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간지 나는 수트’입은 남자들은 참 매력적이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끌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상컨대, 2편이 나올 것 같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관객들은 기대를 하는 모양이다. 2편도 성공할 수 있다면, 박찬욱 감독이나 쿠엔티 타란티노의 <킹스맨>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1 2 3 4